열흘이 남긴 상처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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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볼 장소들

여는 질문

우리는 5.18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요?

5·18 민주화운동 공식 피해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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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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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인정 실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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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후 사망자(자살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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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자(접수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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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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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으로 인한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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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및 고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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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으로 인한 장애

5·18 기간 계엄군 실탄 사용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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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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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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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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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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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M 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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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M 무반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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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신호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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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계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실종된 사람들

여전히 5.18 당시의 인명피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원인과 핵심은 바로 ‘실종자 문제’입니다.

민주화 이후, ‘5.18 당시 실종자’에 대한 신고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총 448건이 중 242명이 1980년 5월에 실종되고, 76명은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5.18 실종자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5·18 직후, 소문만이 무성했던 광주

첫번째 이야기는 목격담이었습니다.

광주 서구에 위치한 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의 보일러가 쉴새 없이 가동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5.18 당시, 너무나 많았던 사망자의 수를 은폐하기 위해 정부가 다수의 시신들을 소각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5.18 당시 군인들이 살해한 시민들의 시신을 곳곳에 암매장했음이 수차례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두번째는 헬기 등 공군수송기를 통해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5월 27일 오전, 쉴새 없이 움직이는 헬기를 보고 사람들이 추정하며 떠돌던 소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2019년 들어, 39년간 밝혀지지 않고 있던 실종자들에 대한 증언과 증거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군의 비밀문건에 광주에서 김해로 ‘시체’가 이송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입니다.

충격적이게도 육군본부의 자료에는 이 부분만 기록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공군 자료에는 5월 25일 광주~김해 운항에 대해서만 무엇을 옮겼는지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비밀문건

2020년 5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진 진실

김용장, 허장환 기자회견

1980년 5월 18일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의 증언

“당시 공수특전단에서 보안사에 가매장 위치, 좌표를 표시해 면밀히 보고했는데, 이는 ‘북한의 간첩이 있는지 엄중히 가려내라.’라는 지시에 따라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간첩 침투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전남 도경의 지문채취 전문 경찰과 함께 가매장된 시신을 전부 발굴했다. 100% 지문을 채취했고 발굴한 시신을 다시 매장하지는 않았다.”

허장환은 지문채취를 마친 시신은 다시 묻지 않고 광주통합병원에서 화장 처리한 뒤 유골 상태로 매장하거나 바다에 버렸다고 증언했습니다.

“광주 통합병원에서 시설을 개조해 화장 처리했고 그마저도 한계에 도달해 다 처리를 못하고 유골 상태로 광주 모처에 매장했다. 시신의 수가 너무 많아 일부 시신은 바다에 버렸다.”

허장환의 증언은 그간 광주에서 유언비어라 여겨지며 떠돌던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는 것들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사람들, 김상호씨의 이야기

김상호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5.18이 끝난 이후, 1984년 11월 김상호씨는 광주에 있는 31사단에서 방위병으로 근무중이었습니다.

여느날과 같이 훈련에 임하던 김상호씨는 영문도 모른 채 지프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바로 505보안부대였다

김상호씨는 다짜고짜 온 몸을 두들겨 맞았습니다.

나중에는 손톱 끝까지 두들겨 맞는 등 온갖 고문까지 당했습니다.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에게 포섭당해 훈련을 받고 5·18때 우리 군인들에게 총을 쏘았다고 진술하라'

그것이 고문의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생전 처음보는 책들을 수십권 쌓아놓고 김상호씨에게 그 책의 일부를 직접 쓰라고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 관련된 도서를 직접 읽고 공부한 것처럼 조작하려는 의도였습니다.

505보안대에 갇혀 고문을 당하던 어느날, 한 군인이 머리에 총구를 겨냥하며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 너 하나 죽여버려도 아무 일 없어. 너같은 놈 한두놈 죽인게 아냐. 5·18때 총기를 가지고 있다가 바다에 버렸다고 진술해라.'

김상호씨는 5·18 당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군인들은 17살의 청소년을 간첩으로 조작하려 한 것입니다.

결국 고문을 견디다 못한 김상호씨는 이들의 말을 따라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김상호씨에게 아무런 혐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15일간 고문을 당했던 김상호씨는 그 폭력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505보안부대는 1980년 5・18 당시 이 지역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및 시민군 등을 체포해 지하실에 유치하고 고문을 하던 곳입니다.

다른 5・18사적지들의 대부분은 저항과 학살의 주요 장소입니다.

그러나 505 보안부대는 신군부가 시민과 민주인사들에게 고문과 폭력을 동원하여 간첩을 만들어내고 허위 사실을 만들어낸, 국가 폭력의 아픈 고통과 상처가 스며있는 곳입니다.

이 공간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작전의 실질적인 지휘본부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사회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입니다.

현재는 군부대가 옮겨가면서 2007년 6월 5.18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 中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 만 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팔십 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 곱절의 죽음, 수천 곱절의 피였다고.”

사망자의 관이 늘어선 망월 묘역. 젊은 아버지를 잃은 어린 남매

닫는 질문

실종자 시신 처리 방법도, 집단 발포 명령자가 누군지도 우리는 아직 알 지 못합니다. 5.18의 진실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역사적 교훈을 위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일부에서는 국민 통합을 위한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교훈과 국민 통합,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