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학(동성고 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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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학 (동성고등학교 1학년 . 17세) 묘역번호 2-34

  • 안장장소 :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 2묘역
  • 묘역번호 : 2-34
  • 성 명 : 문재학
  • 출생년도 : 1964-06-05
  • 사망일자 : 1980-05-27
  • 이장일자 : 1997-06-14
  • 직 업 : 고등학생
  • 사망장소 : 도청
  • 사망원인 : 총상(좌복구 및 전좌경부 관통 총상, 하악골 분쇄 골절상)

우리의 마음에 눈물을 주고 너의 가슴엔 한을 남긴 이승의 못다 이룬 서러운 인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엄마, 아무래도 창근이가 죽은 것 같아요, 긍게 창근이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조금만 더 심부름하다 갈게”

5월 20일 대학생이 주도하였던 시위에 시민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재학도 매일 밖에 다니며 시위에 참여하는 눈치였습니다.
재학은 정치와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런 재학이를 곱게 봐줄 수 없었습니다.
혹여라도 큰일이라도 당할까 싶어 밖에 나가지 말라고 붙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학이 23일부터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25일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재학은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도청 안에서 사상자를 돌보고 유가족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 계엄군이 또 들어온단다, 긍게 집에 인자 가자”
“엄마 아무래도 창근이가 죽은 것 같아요, 긍게 창근이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조금만 더 심부름 하다 갈게”
“그러다 너 죽으믄 어쩔라고 그러냐”
“안죽어, 군인들이 들어오면 손들고 항복하믄 되지, 긍께 걱정말고 빨리 집에 가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창근이의 죽음을 본 재학은 도저히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26일 계엄군이 다시 광주 시내로 진입해 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항쟁 지도부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했고, 특히 중·고생들은 다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재학은 도청에 남아 마지막 항전에 함께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재학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 엄마, 인자부터는 밖에 못나가요. 나, 그냥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

새벽이 되자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어머니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도청으로 달려갔습니다.
재학이가 죽었으리라는 생각은 못하고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미 시신과 부상자들은 군인들에 의해 상무대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결국 아들을 찾지못하고 며칠째 애만 태우고 있던 어느날 재학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전남일보에 사망자 명단이 실렸는데, 재학이 이름이 있어요, 상고 교복 차림이고 고교생인듯하고, 교련복을 걸치고 있다는 인상착의가 실렸어요. 계엄사4-3,묘지번호104,관번호94번이라고 적혀있어요. 아무래도 재학이인 것 같습니다.”

계엄군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시신을 망월동에 가매장 시킨 것이었습니다.

5·18유가족 김길자님이 아들 문재학 군에게 보내는 편지

보고 싶은 내 아들 재학이에게

재학아,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였는데, 엄마는 이제 팔순을 바라본 할머니가 되었단다. 엄마는 네가 생각날 때마다 천국에서 잘 지내리라 생각하고 혼자 위안을 하곤 한다.

하필이면 한창 예민한 사춘기 때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었지.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먹고 싶은 것 먹이지 못하고, 입고 싶은 것 입히지 못할 때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니. 그렇게 너를 보냈으니 지금도 그 짠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구나.

이름만 불어도 눈물이 나는 우리 아들 재학아, 불러도 불러도 이제는 볼 수가 없어 노래를 부른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눈물로 밤을 지새운 지 어느덧 38년이 흘렀구나, 누가 그러더라. 세월이 약이라고,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고, 하지만 세월이 흘렀다고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김치찌개를 유난히 좋아했던 우리 아들, 그래서 김치찌개를 만들 때마다 많이도 울었단다.

석양이 질 때 옥상에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면서 돌아오지 않은 너를 애타게 부르며 울던 기억이 나는구나. 동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다들 실성했다고 했단다.

그때 너를 데리러 도청에 갔을 때, 나만 살자고 돌아가기 싫다며 선배들과 같이 도청을 지키고 싶다는 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구나. 그날 5월 27일 새벽 총소리가 빗발쳤을 때 엄마의 가슴이 찢어지고 또 찢어졌단다. 우리 재학이가 저기 있는데··· 그리고 총소리가 멈췄고, 한동안 너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단다.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망월동에 묻힌 너를 찾을 수 있었지. 그때 엄마는 억장이 무너졌단다. 왜 그때 너를 더 강하게 붙잡고 집에 데려오지 못했는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전두환 정권이 너를 폭도라고 했을 때 엄마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단다. 폭도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엄마는 아주 큰 용기를 냈다. 며칠씩 굶어도 쓰러지지 않았고, 경찰에 끌려가고 두들겨 맞고 박이 터져도 포기하지 않았단다. 그랬더니 폭도 누명이 벗겨지더라.

사랑하는 우리 아들 재학아. 37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 기억 속에는 잊혀 가고 있지만, 엄마는 단 한 순간도 너를 잊을 수가 없구나. 그러나 지금은 끝까지 도청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우리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단다. 누가 죽음이 무섭지 않겠냐. 하지만 17세 나이에 훌륭한 결단을 한 우리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너의 훌륭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그때 일어났던 그 무서웠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할게.

사랑한다. 우리 아들 재학아

2018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