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산학교 오월아놀자

성미산학교의 게릴라캠프 후기 UCC입니다.

김규림

1. 1980년 5월 광주에는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이라 불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황금동 ‘유흥가’에서 성노동자로 일해 그렇게 불렸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5월 광주에서 가장 먼저 헌혈에 자원하고, 황금동 골목이나 자신의 일터에 시위자들을 숨겨 주었으며, 직접 짱돌을 던지며 싸우는 등 용감하고 열심히 운동에 참여했다.

모두들 자신이 도움을 받을 줄 몰랐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함께할 줄 몰랐던 사람과 함께하게 됐을 것이다. 몇몇 시민들은 더러운 피라면서 헌혈과 수혈을 거부하고 피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엔 동료로서 함께했을 것이다.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내용은 교과서에 단 한 페이지 정도만 실려 있다고 한다. 황금동 그들의 이야기는 그곳에조차 쓰이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소수자를 지워 온 역사에 화도 나지만, 자랑스러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앞에 나서서 싸웠던 사람들보다도, 모두 나를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을 위해 나섰던 사람들이 더 멋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 사실 나는 오래된 집이 정말 좋다. 성미산에 있는 경로당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을 때도 공사 중에 자연이 다칠 일도 속상했지만, 한번 들어가 보지도 않은 건물이 부서져 없어진다는 것도 속이 상했다. 무엇이든 오래된 것엔 지금과 달랐던 시간을 살아 온 흔적이 남아있다. 왜 자꾸만 과거의 흔적은 지워야 하는 것이 될까?

505 보안 부대는 1980년 5월에 시민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곳이다. 사적지로 지정이 됐지만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건물 한 채는 화재가 나 타버리기도 하고, 덩굴 풀들도 자라 폐허처럼 보이게 됐다. 그렇게 수십 년을 방치해 뒀다가 이제 와서 무성하게 자랐던 풀들을 다 자르고 말끔하게 치운 후에 주변을 예쁘게 꾸며 역사 공원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건물들은 복원하고 리모델링해서 5·18 교육 연구 시설로 사용하겠다고 한다.

원형을 망치고 새로 뭔가를 한다고 하는 것에 거부감부터 들었다. 사람들이 고문당했던 곳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그 공간을 잠깐 잊고 살았던 시간은 없었던 것처럼 이제라도 잘하는 게 맞는지 아무것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지만, 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다 부수고 멋지게 새로 지어 놓으면, 다 지우고 없었던 것처럼 하면 더 성장한 걸까.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이 정답일지, 우리가 남겨야 하는 것은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외국의 어떤 나라에서 폭격으로 사라진 집의 터를 그대로 보존한다는 얘기가, 그 시절과 비슷하게 꾸며 밀랍 인형을 전시하는 식으로 복원한다는 얘기보다 와 닿는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문해람

06월 1일, 우리는 배이상헌 선생의 기억과 목소리를 통해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계신 분들을 만났다. 그리고 다음날 전남대학교 안에서 김설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이날을 떠올리게 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故 박관현 열사가 후보였을 당시 내건 슬로건은 “민주 새벽을 여는 기차”였다. 새벽, 그 시간은 얼마나 고요한가. 그러나 새벽이란 시간은 본래 격동의 시기이다. 이것과 저것이 마구잡이로 섞여 자연스레 물드는 시간이 새벽이다. 기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죽음들이 우울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겼고,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로 이어졌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왜 이 세상은 누군가 죽어야 미동하는지 그게 너무 화가 났다가도, 나도 같다는 생각에 최근엔 견디기 힘겨울 때가 많아졌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자고 이제 와서 뭔가 하겠다는 마음이 생긴 게 사실은 내가 뭐라도 하고 있다는 안심과 안정을 위해,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인가 하고 의심할 때도 많아졌다. 여행 내내 그런 생각들을 떨쳐내고 집중하려 해도 내가 보는 것들과 듣고 있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연결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대부분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나는 이기적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세월호를 바라볼 때 (혹은 그 외에 타인의 고통들을 마주할 때) 나는 뭔가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이해의 방식이 당사자와 같아지려고 하는 등 여러 이상한 이유로 ‘나’를 삭제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그저 기억하고 있는 1인, 뭐 이런 느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문해람(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철저히 타인과 구분 짓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질문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문해람(인)’으로서 공부하고 활동할 수 있기를. 사실 아직 정리가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방법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움직임(활동)을 멈추거나 진심을 다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진 않을 것이다. 나는 늘 그래왔듯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 새벽을 여는 기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나도 그 기차에 타고 있는 걸까? 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잠시 첫날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 있다. 저녁쯤 우리는 사무실인 동시에 복합 문화 공간인 ‘오월의 숲’에서 들불열사기념사업회의 상임 이사이신 김상호 선생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김상호 선생은 5·18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겪은 일들을 꺼내주셨다. 5월 27일의 기억으로,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서워서 기도실에서 울고만 있었던 그때를 회상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겁나서 못 나갔어요. 무서워서…….”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아오셨을 날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죽음보다도 고통스러운 것들은 이런 것이 아니더냐.

이후 겪었던 505 보안 부대에서의 고문과 거짓 진술로 만들어진 간첩 누명을 쓴 채 살아오셨던 날들에 대해, 그러고선 광주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우리는 광주 5·18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가 5·18과 광주 정신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금의 세상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폭력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흔한 것이 되어버린 곳이다. 눈 돌리면 그만이라 믿고 싶지만 이제 누구도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 오늘 내가 죽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내일 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이제 우린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광주에서 찾았다. 그때 광주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던 이유는 어떤 사상에 대한 변화를 주장하거나, 대한민국이 가야 할 미래를 상상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은 가족, 친구, 지인 등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지키기) 위해서였다. 즉 서로가 서로의 곁이었다. 우리가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너의 곁이 되어 서로를 지켰던 그 경험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일방적인 폭력에 맞서 싸웠던 80년 광주는 2021년에도 여전히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과 연대를 이어오고 있었다. 제주 강정마을이 비자림로 확장 공사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성주 소성리에서 사드 반대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서로의 곁을 지켰던 그 광주 정신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토록 우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에 희망이 있고,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어주는 것에 세상을 변화시킬 답이 있다.


박혜진

5·18을 알아가면서도 기록과 기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최근에 한정현 작가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역사를 접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건이 중심이 된 이야기가 아닌, 개개인의 삶 속의 사건으로 역사를 만났다. 매우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내가 역사를 접한 방식은 사건의 흐름이나 주요 활약 인물을 공부하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기록 역시도 그랬다. 그 인물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존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정현 작가님의 소설 속에는 여러 트랜스젠더들의 삶이 나온다. 이름이 없는 사람의 이름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정상 가족 규범을 깬 계보를 이어가기도 하고, 제주 4·3에서 도망쳐 배를 탄 사람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한 인물을 통해 그 주변과 시대를 만나는 경험을 했다. 트랜스젠더는 현재에 존재하기에 옛날에도 살고 있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런데 ‘왜 역사 속에서는 만나보지 못했을까?’, ‘왜 상상해 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어서 5·18 속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를 접하며 기억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황금동 콜박스’라 칭해지던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5·18 당시 주먹밥을 옮기거나, 시체를 염하거나, 꼬불꼬불한 업소 안에 시위대를 숨겨주는 등 여러 일을 적극적으로 했다고 한다. 특히 헌혈을 할 때 앞장서서 나섰는데, 황금동 여성들의 피는 더럽다며 거부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여성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지만 더럽다는 취급을 받았고, 5·18이 끝나고 나서는 그 존재가 소리 소문 없이 묻혀갔다. 지금에서야 기억을 더듬어 가며, 알음알음 전해져 오는 말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억하고 싶은 5월에는 황금동 여성들이 없었지 않나 하고 추측한다.

광주 들불야학의 김상호님이 “역사는 누가 지정해 주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이야기가 만났을 때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나 역시 역사 속을 살아가는 개개인 중 한명이니까. 역사 속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만나면서 단편적이지 않고 좀 더 풍성하게 역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뭐든지 일반화하면 개개인의 목소리가 지워지기 마련이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던 이야기를 궁금해 하고 다시 기억하는 과정의 의미를 느낀 것 같다.


윤산

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그 속에 나를 대입해서 ‘그때 내가 거기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5·18 자유공원에 갔다. 이곳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상무대와 법정, 영창 등을 복원해 놓고 관련 자료와 영상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군사 재판을 받았던 법정과 6개의 감방으로 이루어진 영창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두 개의 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첫 번째는 고문당하는 장면이 밀랍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는 방이었다. 여기서 광주를 안내해 주신 설에게 5월에 고문을 당했던 분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어떻게 고문을 당했는지를 들었다. 죄 없는 사람한테 죄를 만들기 위해서 글을 쓸 오른손만 놔두고 다른 곳들을 고문했다고 한다. 고문 도구들을 보며 그 이야기들을 들으니 그 당시에 내가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문을 견디면서 내가 아는 정보를 말 안 하고 버티기보다, 고문을 안 당하기 위해서 정보를 불든 죄를 짓든 시키는 대로 다 할 것 같다. 영화 「1987」을 본 후에 광주로 가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용기가 평생 안 생길 것 같다.

다음 방에는 입구에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심하게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얼굴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에는 동정심도 느꼈지만, 그때의 역사가 지금을 만들어 낸 것인데도 그저 남 일처럼만 여기며 ‘내가 그때 안 태어나서 다행이야.’하는 생각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만 하는 내가 너무 싫었고, 죄책감 들어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하루 닫기 시간에 위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나의 감정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는지, 5·18과 같은 폭력은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므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나아갈지를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서 며칠을 계속 생각해보았지만,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직은 내게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삶을 잘 살아낼 자신도 없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이런 일들에 관심을 갖고, 읽고 들으며 공부해 나가는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담

광주 민중 항쟁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귀한 만남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을 뿐이었다. 광주 민중 항쟁 당시 10대였던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가졌다. 80년에 18살이었던 사람이 41년이 흘러 지금의 18살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김상호 선생님은 41년 동안 오월의 기억을 가지고 살았다. 18살 때 재미로 따라갔던 시위에서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기억을 가지고. 사실 여기서 가장 대단한 것은 그때에 머무르지 않고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활동을 이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오월 정신’은 ‘폭력과 차별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시면서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이 멋졌다.(광주에서도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이야기)

근데 그런 것보다도 김상호 선생님의 이야기가 좋았던 이유는, 어떤 투사의 모습이 아닌 개인의 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처음에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그냥 학교를 안 나가서 너무 신났다고 하셨다. 부모님한테는 학교가 쉰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친구들이랑 놀러가서 시위하는 곳에 뭐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행렬에 낀 것이 첫 시작이었다고 한다. 시위대가 부르는 노래도 그냥 신나서 따라 부르면서 다녔다고 한다. 항쟁 동안은 시신들을 닦는 일을 했다고 하셨다. 상무관으로 시신이 오면 피를 닦으셨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내가 상상하던 시민군의 모습이 깨졌다. 투쟁하며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가 나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그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던 시민군의 모습은 불의에 저항하며 투쟁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는 어쩌면 지금의 우리와 다름이 없는, 학교를 안 간다니까 좋아하던 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이미지가 강했었지만, 그날 이야기를 듣고는 죽음 앞에 놓인 두려운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새롭게 다가왔다. 영웅적인 느낌뿐 아니라 좀 더 사람다운 모습이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나도 저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시위대 앞 쪽에서 서 있다가 죽게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근데 내가 그때의 광주 시민이었다면 나도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도 역시 살기 위해 도망치고, 죽음 앞에 두려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난 후(직후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4일 정도 잠깐이라도 잠에 들면 꿈을 꿨다. 평소에 꿈을 잘 꾸지 않았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광주와 군산으로 기행을 가기 전 나는 광주 민중 항쟁을 주제로 한 뮤지컬에 참여했었고, 또 아시아 분쟁 지역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단체인‘아디’로 필드워크 활동을 가서는 활동가에게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재 가자 지구 폭격에 대한 상황들을 들었다.

10일 동안 뮤지컬 공연을 하고 바로 여행을 3박4일 다녀온 후라 지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이 너무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군인의 총에 죽은 사람들. 광주 민중 항쟁은 현재 ‘진정한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과 같은 느낌으로 많이 포장되어 있다. 정작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민주주의를 기념하면서, 실종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은 원인을 밝히지도 못하면서.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해 설명해 주는 분들은 그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아직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실종’들에 내가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내가 지친 상태이기 때문일까 하고 생각은 한다.

그리고 수백 수천 명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는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처참함 앞에서 드는 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두렵다. 이미 팔레스타인의 모든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너무나도 무섭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아이언 돔(iron dome)을 수입해 오자는 이야기나 나오는 것이 가장 무섭다.

꿈들은 대부분 내가 죽는 즈음에 끝났다. 어떤 꿈에서는 중동의 한 시장 같은 풍경 속에서 내가 걷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왔다. 사람들은 당황하다가 놀라서 도망쳤고, 나도 사람들과 도망쳤다. 어떤 건물의 방으로 숨어든 사람들을 군인이 총으로 쏴서 죽이기도 했다. 나는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때 한 군인이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인지했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꿈속에서는 ‘내 동생’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외면하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살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다른 군인이 내가 살아 있는 걸 인지하고 총을 쏘아 날 죽였다. 이처럼 다른 꿈들도 신체가 절단되거나 고문을 받는 내용들이었다.

이전에는 내가 스스로 어렵거나 힘들게 살아온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불만 같은 것도 있었다. 그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공감한다고 느끼는 것도 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이상한 생각을 어쩌면 꿈속에서나마 경험하게 하려고 뇌가 일부러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잠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잠을 자는 순간에는 세상의 고통도, 나의 힘든 일도, 어떤 어려움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잘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거나, 어떤 어려움이나 아픔을 외면하고 있을 때 고통스럽다. 정작 그러면서도 움직이려 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곤 한다. 근데 잠을 자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 지구가 멸망해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가 있는 잠이라는 공간에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때는 자도, 못 자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해서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새삼스레 느낀 것은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어느 샌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 악이 너무나 당연하게, 마치 ‘선’인 것처럼 자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이상한 것들이 ‘당연히’, ‘그래왔으니까’ 등의 말들로 포장되고 있다. 그것이 왜 당연하고 왜 그래왔을지를 의심해야 하고, 또 현실이라는 이상한 논리 앞에 멈추지 않을 수 있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빈

가본 적 한 번 없지만, 광주는 내게 익숙했다. 해마다 오월이면 광주 이야기를 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광주가 익숙한 만큼 나는 내가 광주를 잘 안다고 느꼈다. 군인이 시민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고, 누가 지시한 짓인지도 알았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광주에 가지 않았다. 굳이 가야 할 필요를 몰랐다. 다 아는 사실이니 현장을 방문해 가며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사실 광주에 가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막상 가게 되니 방문해 보고 싶은 장소가 몇몇 떠올랐다. 전남도청이나 민주 광장 같은 장소들이.

그래도 이번엔 내가 광주에 갔다. 가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정말로 내가 광주를 안다고 믿었다. 아주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식은 갖추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당연하게도 광주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었고, 진부한 교훈이지만 내가 광주를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광주에는 29개의 사적지가 있다. 그중 나는 두 장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 장소가 민주 광장과 옛 전남도청이다. 그러니 다른 사적지들 같은 경우에는 이름도 모르는 장소들이 많았던 것이다.

505 보안 부대 옛터 같은 장소가 그랬다. 그곳은 오월의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장소이다. 건물의 내부가 궁금했지만 들어가지는 못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이곳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며 기념 공원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을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은 장소를 다시 고쳐 놓는다고 그 의미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사적지를 보존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건물 복원에 대한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사실 역사적 장소라는 것은 그 장소가 가진 특징보다는 장소가 가진 역사성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에서 505 보안 부대 옛터 또한 그 장소의 의미는 건물의 본래 모습에서 오는 것이 아닌, 건물이 가진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장소의 역할은 이야기를 전하는 전달자로서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이 복원된 건물이라 할지라도 의미 있지 않은가. 나 또한 김상호 선생님의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고 본 장소의 느낌은 달랐다. 하지만 건물 뒤에 놀이터가 들어선 것을 보고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호영

이번 이동 학습은 광주로 갔다. 5·18 민주화 운동을 더 깊게 알아가기 위해 갔다. 광주로 가기 전에 5·18에 대해 배워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관심도 좀 가지고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에서 수많은 광주 사람들이 군인들한테 총에 맞아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것과, 독일 기자인 힌츠페터가 광주에 가서 5·18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찍으면서 세계적으로 알린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고, 광주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떤 분위기의 도시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기대하면서 이동 학습을 가게 되었다.

전일빌딩에 갔던 것과 직접 5·18을 겪어본 분의 이야기를 들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전일빌딩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총알이 245개 정도 박혀 있고 주소지 번호가 245이기 때문에 건물 이름이 “전일빌딩 245”라고 한다. 전일빌딩에 박혀있는 총알을 실제로 보니 너무 놀랐고, 희생자들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헬기 사격 장면도 봤는데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공감도 갔던 것 같다. 사람들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걸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5·18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긴 게 너무 화가 난다. 전일빌딩은 이처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일어난 일들이 잘 기록되어 있어서 좋았다.

김상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상호 선생님은 5·18 피해자이시다. 그 분이 5·18 당시 겪었던 일들을 우리한테 이야기해 주셨다. 그 분이 우리한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용기 내서 이야기 해주셨던 점이 고마웠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안타까웠다. 김상호 선생님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는데,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머리에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고 들었다. 총상을 입으신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이야기해주셨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5·18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좀 생겼다. 그 분이 얘기해주시는 모든 이야기에 공감이 갔고, 총상을 입으셨다고 했을 때 눈물도 좀 났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팠고,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좀 했다. 내가 이런 일을 실제로 당했다면 괴로웠을 것 같고,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왔을 것 같다. 또 사는 게 두려웠을 것 같고, 마음도 계속 불안했을 것 같다.

독일 기자였던 힌츠페터의 묘지가 광주에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시체가 광주에 있는 줄 알았다. 머리카락과 손톱만 광주에 묻혀 있다는 건 이번 이동 학습 때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외에 5·18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잘 알게 됐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라는 도시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광주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게 됐다. 보리밥과 상추튀김이 광주의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들었다. 광주에서 군산으로 이동하기 전에 저녁으로 보리밥을 먹었다. 내가 보리밥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어떤 맛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먹어봤더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맛있었다. 상추튀김을 못 먹은 건 아쉬웠지만 보리밥이라도 먹고 갈 수 있어서 좋았다. 광주는 조용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도시였다. 서울과 분위기가 다르다. 광주 시내도 조용한 것 같았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일어난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점이 좋았다.


정 린

이전에 5·18에 대해서 접했을 때는 잘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내가 접했던 이야기는 대부분 계엄군에 대항해 맞서 싸운 사람들, 또는 그들을 지원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공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나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갈 수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김상호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오던 이야기와 달랐다. 친구들과 놀러 가다가 우연히 시위대에 합류했고, 총을 맞았다. 그리곤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도청에서 결사 항전이 벌어졌던 그 날, 집에 소금을 가지러 갔다가 부모님께 잡혀 교회 3층 기도실에 갇혔다. 거기에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며 커튼을 엮어 창문 밖에 내려 탈출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무서워서 같이 나가지 못한 채 기도실에 남아계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목소리가 작아지셨다. 아마도 이 기억은 트라우마, 혹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하게도 그 시위에 직접 참여했던 것은 커튼을 타고 탈출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보다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가 와 닿았고, 당시 광주의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선생님은 다른 것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베트남전에서 민간인 학살을 했던 한국 군인들이 떠올랐다.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내 옆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것을 바라보며 옆 마을로 들어간 군인들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베트남전쟁과 5·18 두 사건은 그 안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먼저 공부를 하면서 참전 군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처음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접했을 때는 참전 군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을 많이 갖게 되었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있는 상황에 의문이 생겼었다.

작년에 참전 군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공부도 계속하면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참전 군인 개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히 당시 한국군이 충동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군인들을 거기로 보낸 것은 국가였다. 또한, 참전 군인들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후 고엽제로 인한 피해나 PTSD 같은 질병을 갖게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PTSD 같은 질환 때문에 온전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면 이는 상당히 애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애매한 위치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정리했었다.

이것은 5·18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5·18에 대해 잘 몰랐던 시간 동안은 그저 계엄군들에 대한 안 좋은 인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공부를 하고, 기행을 다니면서 보니 베트남전쟁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계엄군들이 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의지로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내려왔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시키는 대로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책임과는 별개로 당시 자신들이, 혹은 동료가, 혹은 같은 군인 신분으로 현장에 갔던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서 가족, 친구가 죽은 것에 대해서 사과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군인 개인이 아닌 그 현장에 있었던 군인 중 한 명으로서, 증인으로서 사과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본인들의 아픔을 이 사회에 알리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정은결

21년 1학기의 이동 학습으로 광주와 군산에 다녀왔다. 광주에서는 80년 5월 광주의 정신을 현재와 연결하며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시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의 활동가들과 함께 5·18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다니며 얘기를 들었다. 군산에서는 새만금과 미군 기지를 둘러보았다. 작년 강정에 가서 들었던 한국이 군사 기지화 되어 간다는 말을, 군산의 미군 기지를 보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탄약고와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겠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쫓겨나 지금은 두 집만 남아있는 하제마을을 지키는 600년 팽나무와 그 곁의 수많은 생명들이 사라지는 건 정말 싫어서 꾸준히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5·18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황금동의 여성들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는 ‘황금동 여성들’이 있었다. 주먹밥을 지어 나르고, 도망쳐 온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숨겨주었으며, 헌혈이 필요할 땐 앞장서 헌혈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피는 환영받지 못했다. 더럽다고 여겨졌다. ‘성매매 업소’의 여성들이라는 이유에서다.

5·18을 접하면서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올해 처음 그들의 존재를 알았다. 내가 알려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18년을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는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았다. 80년 5월 광주에 정말 강인한 모습으로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말이다. 우리가 기억하려고 하는 역사 속에 배제되고 차별 당하던 또 하나의 역사가 있었다.

그때의 여성 혐오는 현재의 여성 혐오로 이어진다. 여성, 소수자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왜 이렇게 바뀌지 않는 걸까.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이유가 기억과 기록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중등 과정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는 방식으로 자연 생태계에 대한 공부와 활동을 해왔지만 포스트중등 과정은 달랐다. 중등에서 다뤘던 이야기 중 (지금 생각나는) 플라스틱으로 인한 자연 파괴 문제나 제주 제2공항 문제는 지금 당장 내 옆에서, 나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죄책감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느꼈고,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생명 중 하나로서 내 곁의 생명을 위해 나를 위해 마음을 쓰고 행동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역사는 나에게는 너무나 멀고 생소한 주제였다. 일단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 자체로 나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포스트중등 과정 진학을 결정하고 가장 크게 고민했던 것이 내가 역사를 그냥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였다. 과거에 있었던 슬픔을 내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공감을 하면 뭐 어떻게 되는 거지? 나한테 포스트중등 과정이 의미 있으려면 나는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포스트중등 과정에 진학했고,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필드워크와 이번 이동 학습 등 여러 활동을 하며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조금씩은 느끼고 있다.

베트남전쟁을 알아가면서도,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어떤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있어 왔는지를 알고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베트남전쟁을 자랑스럽게 기록해놓은 전쟁기념관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베트남전쟁에서 국가가 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선택을 분명히 기억하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차별과 혐오를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곧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희 추모 30주기 포럼 자리에 초대되었던 래퍼 슬릭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혐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라고, “알려는 노력으로 무지에서 비롯된 혐오를 없앨 수 있다.”라고. 나는 그 말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알고 기억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연결시키는 역할의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이야기를 접하는 건 누군가의 전달을 통해 가능하다.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와 연결시키는 사람의 시선, 언어는 듣는 사람이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단순히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도 이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 역할은 중요하다.

나는 5·18이라는 역사 중 소수자가 배제되어왔던 또 하나의 역사를 비인간동물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활동하는 똘추와 복순을 통해 접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베트남전쟁이라는 과거를 공부하고 전달하며 현재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할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떤 관점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떤 언어로 전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이며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이동 학습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무엇인지, 평화를 위해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고 이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한다영

6월 1일부터 4일까지 포스트중등 과정에서 광주로 이동 학습을 갔다. 나는 광주에 같이 가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곳에 갈 때마다 친구들과 영상 통화로 설명을 함께 들었다. 답사한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2곳과, 그 장소의 대한 나의 느낌과 감정이 어땠는지를 얘기해 보려 한다.

첫 번째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6월 1일에 답사한 5·18 기록관이다. 거기에는 5·18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5·18 당시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도 있었다. 그때 당시 어떤 사람이 군부에 잡혀서 끌려가는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도 있었는데, 그림이지만 그 처참한 상황이 너무 잘 담겨서 인상 깊었다. 또 5·18 전후의 일을 정리한 연표도 있었는데, 거기에 ‘김군’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영화로 ‘김군’을 먼저 봤는데 똑같은 사진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장소는 같은 날 답사한 전일빌딩 245다. 올해 41주년을 맞이한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무차별 폭격을 했는데, 그때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인하여 전일빌딩에 245개의 총알이 박혀서 전일빌딩 245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도 그 총알이 박혔던 탄흔을 봤는데, 처참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총알을 그렇게 많이 퍼붓는데 안 부서지는 것도 이상하지만, 콘크리트가 그렇게 뚫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계엄군의 헬기 모형도 볼 수 있었고, 당시 사격당한 자리도 있었으며, 바닥에도 탄흔이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참혹하다. 난 탄흔을 처음 보는 거라서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전일빌딩 245에서는 광주 5·18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는 가상현실 체험도 가능해서 다음에 광주에 가게 된다면 꼭 실제로 보고 싶다.

왜 뜬금없이 인간의 존엄성 이야기를 꺼냈냐면, 우리나라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한 적이 많았지만, 50년 전만 따져본다면 그 중 특히 5·18 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많이 훼손되지 않았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전두환과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상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광주 시민들이 그 행위에 항의하며 시위를 했지만, 그 당시 전두환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시민들을 무력으로 몰아냈고, 그 과정에서 신군부의 잔혹한 폭력으로 죽어간 전북대학교 재학생이었던 이세종 등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그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출생으로부터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는 천부 인권 사상의 표현으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존엄한 가치를 보장받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하는데, 5·18 때 전두환과 신군부는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하며 시위대를 폭도라고 부르며 폭력으로 진압하였고, 이를 외부에는 기밀로 해 광주 밖으로 절대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존엄성은 지킬 사람만 지키는 게 아닌, 모든 사람이 다 지켜야 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이 더 잘 지켜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더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되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 눈에도 안 들어올 것 같으니까. ‘살고 봐야겠지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광주에는 아무 일 없다며 광주 시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조작하여 뉴스에 내보내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은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은폐하고, 거기다 수많은 시민들을 잔혹한 무력으로 죽게 하다니. 인간이 아니고서야 그런 범죄는 할 수도 없고,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절대. Never. 아무리 역사가 되풀이 된다지만, 부디 5.18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미얀마의 시민들이 군부에 의해 잔혹하게 고통을 받고 있으니 그 방법도 찾아야 하겠지.

그리고 광주 5·18 관련 영화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김군’(전체 관람), ‘오월애’(전체 관람), ‘5·18 힌츠페터 스토리’(12세 이상 관람), ‘택시운전사’(15세 이상 관람) 등이 있는데 한 번쯤 보면 좋을 것 같다.


홍채원

나는 이 여행을 가기 전까지 5·18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고, 국가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은 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작년에 5·18관련 공부도 했었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걸었던 광주의 길들은 너무 깨끗했고, 평화로워 보였다. 40년 전의 흔적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싸움을 지속하신 광주의 시민들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들로 느끼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생생하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광주의 시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웠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마음가짐이 있었고, 그 속에 어떤 숨겨진 아픔들이 있었는지 등을 사건의 중심이 되는 장소들을 찾아가면서 들었다. 그곳들에서 그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고,4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으며, 5·18이라는 사건을 예전보다 입체적으로 보려고 그곳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 것 같다.

여행 첫날에 망월동 묘지에 갔을 때, 몇 명 열사들의 생애와 그들이 돌아가시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은 이야기는 망월동 묘지에서 들은 한 아이의 이야기였다. 아이와 엄마가 산책 도중 시민군에게 빵을 나눠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이가 엄마와 함께 시민군에게 빵을 나눠주다가, 계엄군에게도 빵을 나누어 주라는 시민군의 부탁에 계엄군에게도 빵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발포 명령으로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총을 쏘았다. 엄마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아이는 결국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아이의 죽음이 슬프고 안타까워서 그랬기도 했지만, 그전에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빵을 나누어 주고 계엄군이 그 빵을 먹었다는 것이 굉장히 의외의 사실로 느껴졌다. 이야기를 다 듣기 전에는 계엄군이 빵을 받아먹지 않고 엄마와 아이를 위협했을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내가 생각한 계엄군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으로 두기에도 애매한 입장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모든 계엄군을 일반화 시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들이 방금 전에 자신에게 빵을 나누어준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그리고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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