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20일 : 전쟁터 광주, 언론의 입을 막는 전두환
만나볼 장소들
1980년 당시 광주역에는 지금과 달리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는 광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 송정역과 광천터미널이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계엄군들이 기차를 통해 광주역으로 들어오는 등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당연히 계엄군은 초창기부터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고 많은 시민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여러차례 진행했습니다.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하고 있던 3공수여단은 전남대학교로의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시민들을 향해 최초로 집단발포를 실시했습니다. 이날 최소 6명이 광주역에서 숨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역에서 사망한 두 사람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군의 야만적인 학살을 시민들에게 알렸습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등이 입주해있는 구시외버스터미널 역시 5.18 당시 여러 사건들이 발생한 곳입니다. 5월 18일, 금남로로 행진한 학생들을 쫓아온 군인들은 버스에 난입하여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은 모두 구타하고 끌어냈습니다. 5월 20일까지 이곳에서는 도청 만큼은 아니었지만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서 다양한 충돌들이 있었습니다. 버스는 5월 21일을 기점으로 운행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여는 질문
만약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의 동료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아요?
'내 가족 , 내 친구를 내놔라!'
5월 19일부터 대학생 중심의 시위가 시민들의 시위로 퍼져갑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진압에 평범한 시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하자 시위는 광주 전역으로 확대됩니다. 신군부는 장갑차까지 내세우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시민들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믿었습니다.
설마 저들도 같은 시민인데, 겁만 주려고 저러는 거겠지. 진짜 쏘겠어?
시민들이 장갑차를 에워싸고 항의하자 한 장교가 M-16 소총을 발포했습니다.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조대부속고등학교 3학년 김영찬 학생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들은 진짜 쏘았습니다.
'선생님 우리 광주시민들이 다 죽어가는데 뭔 놈의 수업입니까!'
시내의 상황을 들은 대동고 학생들은 학내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어 광주일고와 중앙여고 학생들도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집회를 진행했습니다.
고등학생들의 시위소식을 접한 전두환은 광주의 모든 초중고교 임시휴교를 명령했습니다.
‘겁이 없는 어린것들’ 이 나서면 나라가 뒤집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휴교령으로도 금남로로 모이는 청소년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군인들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 학생들이 결합하며 5월 20일 광주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함성으로 가득찼습니다.
'우리가 차로 막으면 공수놈들이 시민들 패지는 못할것이여'
5월 20일, 부상당한 시민을 병원으로 태우고 가던 택시기사가 계엄군의 대검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광주 전역에 퍼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택시, 버스, 화물차 기사들은 “사람 죽어나가는디 어떻게 영업을 하겠냐” 며 저녁 여섯시 무등 경기장 앞으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곧 장 금남로로 향합니다. 대형 버스들이 앞장섰습니다.
200대가 넘는 택시가 줄지어 공수부대원이 지키는 저지선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5월 20일 이 시위를 기점으로 5.18 민주화운동은 시민의 항쟁이 됩니다.
지금은 5월 20일을 ‘민주기사의 날’ 로 지정하여 특별하게 기념하고 있습니다.
광주에 대한 거짓말 : 신군부, 언론의 입을 틀어막다
20일을 기점으로 시위의 규모도 커지고 사기가 높아졌습니다.
공수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이 알려지는게 두려웠던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사를 통제했습니다.
언론과 신문사에서는 연일 ‘간첩의 조종을 받는 시민들’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 이라며 왜곡보도를 내보냈습니다.
당시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릴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일제히 사직서를 제출하며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학살의 시작, 계엄군 첫 집단발포
5월 20일 밤 11시 공수부대는 광주역 앞에 모인 시민들에게 느닷없이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무기가 없는, 말그대로 무장해제 상태인 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한것입니다.
네 명이 죽고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날의 집단발포는 이 후 광주를 향한 의도적인 학살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닫는 질문
1.내가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나의 친구가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은 했을 것 같나요?
2.41년전 언론사와 신문을 통해 보도된 5.18에 대한 가짜뉴스들이 지금은 유튜브와 SNS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가짜뉴스' 를 막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3.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싶은 사람들을 누구이며 왜 그런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