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18일, 그 날의 기록: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대학생들의 저항

만나볼 장소들

사적지1호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항쟁의 불씨가 뿌려졌습니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렸습니다. 계엄군은 항쟁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여기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주검은 학교 안에 매장되었다가 그 후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정문 앞에는 용봉천(개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 감금했던 이학부 건물도 철거되었으며 교문도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김경철 (묘역번호 1-01) – 5.18민중항쟁과정 첫 사망자

김경철씨는 어린 시절 뇌막염을 앓던 중 청각을 잃은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신발 만드는 기술을 익혀 서울에서 양화점 일을 하다가 광주에 내려와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28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고 얼마 후 딸 혜정씨가 태어났습니다. 김경철씨는 딸 혜정씨의 100일 잔치 후 가족모임을 가졌습니다. 이후 처남을 배웅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친구들을 만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날은 1980년 5월 18일 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공수부대원들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그의 모습을 보고 공수부대원은 다짜고짜 곤붕으로 후두부를 가격했습니다. 계엄군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신분증을 보여주며 자신이 청각장애인임을 밝혔습니다. 그들은 지시에 따르지 않으려 장애인 흉내를 낸다며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치료를 받던 중 다음 날 새벽, 사망했습니다. 5.18 당시 첫 사망자이자, 청각장애인이었던 그의 죽음은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 왔다”는 계엄군의 명분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여는 질문

신군부는 왜 광주를 선택했을까요? 5.18 민중항쟁은 왜 광주에서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젊은 학생들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있는데, 내려가서 도와줄 용기가 없어 부끄러웠다.", "총이 있었다면 나라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주화를 기대하였던 시민들의 가슴에 총을 겨눈 5.17 쿠데타

출처 : mbc 1995년 11월 27일자 뉴스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는 자신들의 정권 장악을 위해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국회를 폐쇄해버렸습니다.

또한 아무런 이유도, 영장도 없이 정치인 및 재야인사를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국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생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쿠데타에 대하여 반대 시위를 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저항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학생 대표자들을 검거하고 가두었습니다.

무법천지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월 광주의 시작, 약속을 지킨 전남대학교 학생들

5월 18일 새벽, 광주에도 계엄군이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전남대와 조선대를 점령하고 학교 건물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다짜고짜 구타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행을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경, 학생 대표자들이 도피한 가운데 ‘휴교령이 내려지면 각 대학 정문에서 모이자.’라는 약속을 떠올린 학생들이 삼삼오오 학교로 모였습니다.

이들 외에도 수업을 듣기 위해 온 학생들과 봄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일방적으로 학교 출입을 막았습니다.

총과 곤봉으로 공수부대는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광주시민들은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이루어진 폭력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습니다.

삼십 여 명으로 시작한 저항이 순식간에 수 백으로 불어났고, 시민들은 외쳤습니다.

가자! 도청으로!

시민들은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거리까지 행진하며 항의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 시위가 일어났던 전남대 정문은 현재 5.18 민주화운동의 첫 번째 충돌 장소, 5.18 사적지 1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 희생자,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의 죽음

가족들과 함께 딸의 100일 잔치를 치른 후 집에 돌아가던 시민이 있었습니다.

이 시민의 이름은 김경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김경철씨는 길을 가로막는 군인들에게 자신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려 장애인등록증을 보여주며 수어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오히려 김경철씨를 더욱 세차게 군봉을 휘둘렸습니다.

김경철씨는 그 부상으로 적십자 병원에 실려가게 됐고, 다음 날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은 장애인이건, 어른이건, 아이건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해, 저항하게끔 하는 계획적인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계엄군의 폭력은 이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가장 먼저 행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점이 5.18의 첫 희생자가 청각장애인이었던 김경철씨라는 점입니다.

간첩과 폭도를 진압해야 한다는 계엄군의 명분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5.18 기록관인 금남로 가톨릭센터 6층에서, 군인들의 폭행을 목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광주대교구의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 김성용 신부였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있는데, 내려가서 도와줄 용기가 없어 부끄러웠다."

"총이 있었다면 나라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닫는 질문

전두환은 왜 계엄군으로 공수부대를 보냈을까요? 왜 처음부터 비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잔혹한 폭력 진압을 명령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