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26일: 광주를 지키는 시민들, 광주를 죽이는 계엄군

Share on facebook
Share on twitter
Share on email
Share on print

만나볼 장소들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 (사적지14호.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184)

1980년 5월 23일, 광주를 빠져나와 화순으로 향하던 어느 버스는 주남마을 인근에서 계엄군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계엄군은 버스가 정지하지 않자 즉시 버스를 향해 발포했습니다. 18명의 탑승자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남은 3명 중 2명은 산으로 끌려가 살해당했습니다. 살아남은 한사람만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버스가 있던 현장과 두 청년이 세상을 떠난 곳에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무관 사적지 5-3호

상무관은 5.18 당시 시신이 안치된 장소였습니다. 계엄군이 철수한 뒤 시신들이 자연스레 5.18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신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가족들을 찾는 시민들이 광주전역을 헤매고 다니는 문제 등을 감안한 시민들은 도청 앞에 위치한 체육관이었던 상무관에 시신들을 안치했습니다. 5월 22일부터 시신이 안치되었으며 5월 27일을 기준으로 60여구의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5월 29일, 상무관에 안치되었던 시신들은 망월동 시립묘지로 이송되었습니다.

 

 

양동시장 사적지 19호

양동시장은 5.18 당시 집회가 열리던 곳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나 5월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해방 광주’에서 양동시장에 나온 시민들은 동별로 돈을 걷어서 주먹밥, 물, 김밥, 음료수 등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해방광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양동시장의 광목천은 세상을 떠난 시민들의 수의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5·18 민주광장, 사적지 5-2호

5·18 민주광장은 구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시계탑을 포함한 도청 앞 광장입니다.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민족민주대성회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5월 21일까지는 계엄군의 바리케이트에 의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집단발포 후 계엄군이 퇴각하자 시민들은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1차례씩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26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차례가 진행되었습니다. 광주의 열흘을 모두 지켜본 장소였습니다. 5.18이 끝난 후 ‘시계탑은 알고 있다’는 구호가 널리 퍼지자 군부는 어느날 밤에 몰래 시계탑을 농성공원으로 옮겨두었습니다. 시계탑은 2014년 6월에야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현재는 매일 오후 5시 18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재생됩니다.

여는 질문

5일간 군인과 경찰의 부재, 치안을 지키는 이들이 없는 도시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눈부신 시민 정신과 드높은 자치 정신으로 ‘시민 자치’의 모범이 된 광주

5·18의 장면들, 고립되었으나 외롭지는 않았던, 해방의 광주

그 누구도 광주에 들어 올수 도 나갈수 도 없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광주시민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계엄군에 포위된 고립된 광주가 되었습니다.

계엄군은 총을 손에 쥔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광주는 계엄군들이 바라는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공권력이 없어진 상황속에서도 시민들을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습니다.

5·18의 장면들, 음식과 피를 나누는 사람들, 평등과 연대의 광주

다친 이들을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줄지어 헌혈을 하였습니다.

도시를 청소했고 서로를 위로하며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광주에 45개의 은행이 있었지만 단 한 건의 강도, 절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해방광주’라고 부릅니다.

5·18의 위대함은 시민들이 억압에 대한 저항을 넘어 자치공동체를 형성했다는데 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올바른 뜻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죽음과 두려움 앞에서도 광주시민들은 옳지 않은 것에 일어나 싸웠습니다.

시민들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의 광주 시민들은 눈부실 정도의 시민 정신과 드높은 자치 정신을 발휘 했습니다.

5·18의 장면들, 해방광주의 시민들은 매일 도청 앞 분수대에 모였다

5월 23일, 제 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26일까지 이어진 궐기대회에는 매번 7만 여명의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1980년 당시 광주 인구는 85만 명이었습니다.

매일 한 도시의 열명 중 한명이 참가했던 것입니다.

극단 ‘광대’의 김태종이 사회자를 맡았고,

노동자 대표로 들불야학 강학 김영철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김태종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외쳤고,

김영철은 노동자 대표답게 광주공단 노동자들도 함께하고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광주지역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군에 사망자 명예회복 등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무기 회수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의 행보에 불만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총기를 모두 반납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엄사에 치안을 맡겨야 합니다!”

5월 22일 분수대에 결집한 시민들 앞에서 장휴동 수습대책위원은 총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발언이 나오자 분노한 시민들의 야유가 쏟아졌고, 대학생 김종배씨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빼앗았습니다.

김종배씨는 도청 앞 남도회관에 모여있는 대학생들에게 “이번 사태는 대학생이 책임을 져야할 일”이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고뇌하는 광주, 싸울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

5월 24일 밤 9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렸습니다.

위원장 김창길은 무기반납을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이에 수습위원 김종배와 박남선이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이대로 도청을 내어주는 건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격노한 박남선이 의자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김창길 위원장은 일방적으로 무기반납 입장을 밀어붙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켜야한다, 새로운 항쟁지도부 '민주투쟁위원회' 의 등장

5월 25일 오후,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은 학생수습위원 박남선과 김종배를 차례로 만났습니다.

윤상원은 그들이게 새로운 도청 항쟁지도부를 꾸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어 전남대학교와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던 사회운동가 정상용, 윤강옥, 박효선, 김영철, 정해직, 이양현이 함께 항쟁의 지도부로 도청에 들어갔습니다.

이로써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 이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항쟁 지도부는 ‘민주투쟁위원회’로 재편되었습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23일-24일 군부의 민간인 학살

한편, 광주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사건

5월 23일 정오, 계엄군은 18명의 승객을 태우고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계엄군의 발포는 버스 기사가 사망해 버스가 고랑에 빠질 때까지 지속 되었습니다.

탑승자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군인들은 버스에 올라탄 후 시신에 대검을 찌르며 확인사살을 하였습니다.

계엄군은 생존자 3명을 부대로 끌고 갔습니다.

중상자 2명은 야산으로 끌고 가 권총으로 살해한 후 암매장했습니다.

계엄군은 손에 가벼운 부상만을 입었던 홍금숙씨를 협박한뒤(구체적인 내용추가) 풀어주었고, 그만이 해당 버스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의 증언

"저희들이 차에서 살려달라고, 여학생들이 몇 명 있었거든요.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그러는 데도 계속 총알이 날아오고. 버스에 탄 군인들이 대검을 들어대면서 하는 말이 ‘너도 유방 하나 잘리고 싶냐?’ 그러더라고요."

송암동 학살사건

1980년 5월 24일, 11공수여단은 송암동과 효덕동 인근을 이동하던 중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11공수여단은 즉시 트럭에서 내린 후 반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11공수여단을 향해 공격한 것은 같은 계엄군인 전투교육사령부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엄군간의 오인교전으로 9명의 사망자와 3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5.18민중항쟁 기간 동안 사망한 군인은 모두 23명입니다.

이 중 13명은 모두 계엄군 사이의 오인사격으로 발생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계엄군을 학살한 것 역시 계엄군이었습니다.

분노한 계엄군은 송암동의 민간인들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그들은 민가에 침입하여 세 사람을 끌어낸 후 총살했습니다.

권근립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끌려가서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민가에서 키우던 칠면조들을 향해서도 총기를 난사하여 2백여 마리를 죽였고 젖소를 비롯한 가축들도 죽였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1공수여단 병력은 이동 중 저수지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을 향해 발포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놀이터에서 놀고있던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와 중학교 1학년 방광범 등이 가슴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이날 송암동에서 8명의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막는 것밖에 없었다, 죽음의 행진

5월 26일 새벽 4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당시 광주 외곽이었던 농성역 광장으로 이동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성용 신부는 맨몸으로라도 탱크를 막으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곧 수습위원 17명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습위원들은 농성역 광장에 진출한 계엄군의 탱크를 비무장 상태로 막아섰습니다.

군인들과 수습위원들의 대치가 이어지다가,

탱크를 후퇴시키라는 수습위원들의 요구를 계엄군 부사령관이 수용하며 뒤로 물러섰습니다.

오후 6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마지막 회의가 도청에서 열렸습니다.

계엄군이 27일 새벽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 후, 도청지도부는 급격히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진통 끝에 다수결로 무기반납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싸움을 멈추자고 하는 것은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다. 우리는 매일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의 함성을 듣지 않았느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계엄사에서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준 것이 무엇이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항복을 한단 말이냐?"

닫는 질문

1. 유네스코는 현대 민주화운동으로서는 유일하게 ‘5.18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자치공동체’였습니다.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자치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2. 우리 나라에서는 같은 나라의 군인에 의해 행해진 민간인 학살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