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 필사적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우린 폭도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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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볼 장소들

구 전남도청 사적지 5-1

전남도청은 5·18 당시 행정기관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5월 21일, 집단발포 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자 도청은 시민들의 거점이 되었다. 도청에 있는 회의실에서는 앞으로에 대한 회의가 매일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 5월 27일, 시민들은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여는 질문

광주의 시민들은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저항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할 때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5월 27일, '그날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도청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스산한 기운이 도청 주변을 감쌌습니다.

모두가 이 자리에 남아있으면 분명히 모두 죽고 말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청에 남을 것인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두고 고뇌했습니다.

그동안 무죄한 시민들이 쓰러져 가던 모습을 보아왔지만, 도청에 남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가족이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죽게 될 경우 남겨질 가족 생각에 괴로워 했습니다.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윤상원은 시민수습대책위가 무기반납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윤상원은 남은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기를 결의했습니다.

도청에서 항쟁의 마지막을 준비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하다,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많은 이들이 도청에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몇몇의 청소년들은 끝까지 남아 싸우겠다며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윤상원은 돌아가지 않고 도청에 남아있는 청소년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들의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 가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전남도청, 가망이 없었던 마지막 전투

도청에는 최후의 전사 157명이 남았습니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이 임박한 새벽 3시 50분,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송원전문대 2학년 박영순의 절규는 광주시민의 가슴을 송곳처럼 후벼팠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 4시 10분,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되다

계엄군은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사격을 해댔습니다.

선봉대는 순식간에 수류탄과 M-16 총탄을 앞세워 도청 방송실과 민원실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순간 총에 맞은 윤상원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3시간 만에 도청은 완전히 점령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군 16명이 사망합니다.

"두려웠다, 너무나 두려웠다", 도청 마지막 전투의 생존자 박천만 씨의 증언

“왜 안 두려웠겠어요? 27일 날 마지막 새벽까지 도청에 있었어요. 안전핀 다 끌렀어요. 당기면 총알이 나가게끔. 걔들이 오면서 총을 쏘는데,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총을 갈기고 온 거예요. 그 속에서 동지들이 몇 명이나 돌아가셨는지 몰라요. 솔직히 거기서 두려운 마음도 있었어요. 왜 안 두려웠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그때 당시 20대니까. 얼마나 젊은 청춘 아니에요? 그때 제 여자 친구가 배가 불렀어요. 몇 개월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에 제가 가서 있었던 거예요”

오월과 함께 꺼져 간 들불

들불야학의 박용준과 투사회보팀은 YWCA 1층 소심당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계엄군과 대치하던 중 박용준은 얼굴에 총을 맞고 비명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었던걸까요.

박용준은 5월 26일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모든걸 용서하시고 세상에 관용과 사랑을!”

5월 광주, 한국 민주주의의 영감이 되다

5월 18일 이래 10일간의 항쟁은 수 많은 시민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들의 장렬한 항전은 광주 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불씨가 되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불타올랐고,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신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상원의 말처럼, 그들은 영원히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의 역사는 조금씩 ‘누구나 행복할 권리’ ‘누구나 평등할 권리’ ‘누구나 차별받지 않을 권리’ 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향해 전진하며 부활해가고 있습니다.

닫는 질문

1.내가 윤상원의 말을 듣고 도청에서 나온 청소년이었다면,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윤상원과 시민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2.‘5·18은 패배했지만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3.지금까지 여러분이 마주한 일들이 실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겨지시나요?
아마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이 일들을 어렸을 적 경험하셨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지 물어보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