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5시간 일하면 기계도 고장난다
여는 질문
1960~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어떻게 가능했을까?
임을 위한 행진 그 첫 장소, 한강
‘임을 위한 행진’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바로 서울의 중심, 한강입니다.
여러분은 ‘한강’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한강 둔치에서 돗자리를 깔고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강변을 따라 뜀박질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장면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여러분,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은 남한 국토의 전반을 파괴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전쟁 이후 1960년대부터 매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전 세계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만큼 빠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화려한 불빛 뒤에 가려져 있던 착취와 수탈
‘한강의 기적’이라는 화려한 불빛 뒤에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우리 법에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근로기준법이 있었으나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대문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은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하여 달이 차오른 밤까지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공장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잔업에 야간작업까지 투입되어 일하고도 터무니없이 싼 일당으로 삶을 연명해야 했습니다.
눈부신 경제 성장, 그 이면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있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 그 두 번째 장소, 청계천 평화시장 그리고 전태일
현재 동대문에 위치해 있는 평화시장은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명소입니다.
평화시장은 의류, 모자, 스카프 등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공장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패션상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 곳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옷을 만들고 판매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온라인전시
https://museum.seoul.go.kr/CHM_HOME/jsp/MM03/vr/122/index.html
서울역사박물관 온라인전시 '동대문 패션의 시작 평화시장'
1960년대 평화시장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식료품, 의류 등 경공업 중심의 수출전략을 펴면서 평화시장의 일감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평화시장은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전쟁 이후 실업률이 높았기 때문에 평화시장에 일하고자 하는 이들은 줄을 섰습니다.
넘쳐나는 일감과 인력 사이에서 공장주들은 낮은 임금으로도 손쉽게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대구 남산동, 집을 떠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한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시다’의 하루 임금은 50원. 당시 차 한잔 값은 50원이었습니다. 하루 14시간을 일하면 겨우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대가가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의 전부였습니다.
1년여간 일을 배운 전태일은 재단보조 일을 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인 월급 3,000원을 받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전태일의 주변에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당 70원에 14시간씩 일하는 어린 여공들이 있었습니다. 전태일은 그런 여공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던 중,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자로 가득한 이 법을 알려 줄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진행하였고, ‘바보회’라는 노동자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건의서, 진정서를 제출하며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주와 정부는 전태일의 간절함을 무시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습니다.
전태일의 마지막 외침과 같이 그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1970년대에만 2,500개 이상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동의 현장과 사회의 현실을 바꾸어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전태일 재단 홈페이지
http://www.chuntaeil.org/
지금 우리 곁의 전태일,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꿔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외치며 몸을 불사른 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는 전태일이 있습니다.
2020년 8월 19일 가면을 쓴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들이 전태일 다리에 섰습니다.
전태일 50주기 캠페인이었습니다.
청년유니온과 패션어시 노동자들은 이 자리에서 패션업계의 노동실태를 고발했습니다.
“50년이 지났습니다. 이 다리에는 여전히 억울한 청년 노동자들이 서있고,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화형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시간당 평균 임금 3,989원. 50년 전 ‘시다’가 오늘의 ‘어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인들의 노동실태를 고발하고 변화를 만들어가겠다고 선언한 패션어시 노동자들은 청년유니온과 함께 노동조합을 설립하여 ‘패션어시유니온’ 2021년 4월 창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일하는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전태일입니다.
[나 때는 다 그렇게 했어] 시급 3천989원짜리 24시간 대기조 ‘스타일리스트 보조’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5368
닫는 질문
1. '한강의 기적'으로 이야기되는 한국사회의 경제성장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바탕되었습니다. 2021년, 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한국.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지금 노동자들의 삶은 과연 어떤가요?
2. 우리가 50년 전 전태일이었다면? 지금 일을 하고 있는 곳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