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타오르는 불꽃, 들불야학의 태동

여는 질문

전태일의 죽음을 마주한 이후, 전태일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하였던 사람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임을 위한 행진 그 세번째 장소, 들불야학옛터

들불야학옛터 사적지27호

청계천 평화시장을 지나 세번째 장소인 들불야학옛터로 향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야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야학이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밤에 수업을 하는 비정규 교육공간을 말합니다.

지금은 의무교육을 통해 본인이 원한다면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7-80년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거나 아예 학교에 다니지 못한 채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공장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태일 역시도 초등학교를 중퇴하였으며,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알려줄 대학생 친구가 있었다면! 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려운 한자어와 생소한 단어로 가득한 근로기준법은 쉽게 읽어나가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날 ‘들불야학’의 이야기는 전태일의 죽음이 던진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하고자 노력하였던 이들의 이야기이자,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박기순과 윤상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7년, 박기순의 고민

전남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청년 박기순은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알게 된 뒤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박기순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선언으로 78년 6월 전남대학교 교수들이 나서 박정희 정권의 군사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선언을 발표한 교수 11명은 독재 치하의 공안당국에 구속되었습니다.

박기순은 이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매일 학내시위를 조직하다 연행되었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1975년 5월 13일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유신정권은 학도호국단제의 실시와 군사교육 강화, 교수 재임용제 등으로 대학에 대한 억압적인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1977년 이후에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학생들의 구속과 제적 역시 일상적이었습니다. 대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점차 노골화되어 대학 캠퍼스마다 중앙정보부 사복요원들이 상주했습니다.

1978년 6월 27일, 이같은 현실에 반발하여 전남대학교의 양심적 교수 11인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습니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을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모순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구체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우리의 교육지표가 발표되자 서명자 11명은 즉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특히 전남대 역사교육과의 박기순이 이러한 시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위대는 도서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진행하였고 이같은 농성이 해산되자 시내로 진출하여 유신철폐를 외쳤습니다. 시위는 3일간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500여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이중 학생 14명과 YWCA 간사, 선언문을 인쇄해준 인쇄소 주인등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박기순은 더 이상 학교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박기순은 노동하는 시민들이 마주하고 있는 이 현실을 바꾸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노동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나아가 전태일의 의지를 잇는 야학을 만들기 위해 함께 할 동지들을 설득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은 필요악이다. 가난한 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로 덕을 입고 있는 대학인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은 불합리하게 혜택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난한 자와 함께 진정한 역사 창조의 대열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
박기순의 일기 중

전태일을 잇다, 들불야학의 시작

들불야학 옛터 사적27 (광주광역시 서구 죽봉대로 119번길 28-13, 광천동성당)

1978년 광주 광천동에 정규 학습을 받지못한 노동자들을 위한 야간 학습기관으로 설립된 이 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이다. 노동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고 민중생존권 투쟁의 불길을 피워 올리기 위해 들불야학의 문을 열었으며, 광천동 성당에서 제공하여준 교리실을 학당으로 사용하였다.

들불야학은 ‘80년 5․18민중항쟁 당시 투사회보 제작 ․ 배포, 항쟁지도부 구성 및 5월 27일 새벽의 최후항쟁 등에 조직적, 주도적으로 참여한 결과 인명 손실 등의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81년 4월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78년부터 ’98년까지의 20년 동안에 우리들 곁을 떠나가신 들불야학 관련자들은 무려 일곱 분이나 된다. 지금 현재는 광천동성당이 새롭게 지어지면서 당시 교리실은 헐어지고 일부 벽체만 보존되어 있다.

들불열사들은 삶의 자세 또한 하나같이 순수하고 성실했으며 헌신적이었으며 야학운동과 5․18민중항쟁뿐만 아니라 빈민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분야에서도 제각기 선구적, 핵심적,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광천동 성당 교리실

1978년 7월 23일, 당시 광주공업단지를 옆에 끼고 있던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서 들불야학의 입학식이 열렸습니다. 입학식에는 35명의 청소년들(평균 연령 17~18세)과 박기순, 신영일 등 8명의 강학이 모였습니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강학’과 ‘학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다

이들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동등한 주체로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강학은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을, 학강은 ‘배우면서 또한 가르친다’ 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들불야학 체육행사

야학의 이름으로 박기순이 제안한 '들불'이 채택되다.

박기순은 동학혁명을 다룬 유현종의 소설 ‘들불’과 미국 노동운동가 어거스트 스파이스의 법정 최후 진술에 나오는 ‘들불’에서 이름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전 세계에 번진 노동자들의 들불을 광주 광천동에서 지펴보자!”

“만일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고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그 누구도,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는 없으리라”

끌 수 없는 들불처럼, 들불야학에는 모두가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들불야학에서는 영어, 수학과 같은 과목과 검정고시 공부 등 기초적인 교육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노동권, 세상을 응시하는 눈을 기르는 사회 및 문화도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들불야학의 학강과 강학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열악했던 들불야학, 박기순의 이른 죽음

그러나 들불야학 교실은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진 건물은 여름에는 지독히 덥고 겨울에는 살을 에듯 추웠습니다. 겨울을 나려면 난로를 지필 나무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197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박기순은 학강들과 함께 뒷산을 헤매며 나무를 주웠습니다. 저녁에 야학 수업까지 마친 후 집에 들어간 박기순은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지쳐 잠이 들었고, 그렇게 스물 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기순의 이른 죽음 이후, 들불야학의 사람들은 그 뜻을 이어나가고자 했습니다.

번져가는 불꽃들, 윤상원과 벗들

윤상원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님의 헌신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에 취업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신독재 정권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고 있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차마 편안한 직장인으로서 삶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1978년 여름, 윤상원은 어렵게 합격한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1시간 120원’의 공장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1978년 당시 물가

1.자장면: 200원 (평균)
2.영화관람료: 700원 (평균)
3.담배: 150원(청자 기준)
4.대학교 수업료: 최저 149,800원/ 최고 212,800원
5.지하철 50원(기본구간)
6.시내버스: 45원
7.택시: 250원(기본료)
8.쌀 17,250원 (40Kg)

“아고메! 피곤허다. 정말로 피곤해 미치것다. 난생 처음으로 공장노동을 시작해 보는 날이었다. 도시락을 자전거 뒤에 꽁꽁 매달고 늦을세라 페달을 밟아 회사에 도착해 보니 7시 50분. 꽤 정확한 셈이다. 공장장 인도를 받아 절단부로 배치되었다. (중략) 제일 궁금한 것은 나의 노임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한 시간당 120원이라고 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니까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하면 10시간 노동인 셈이다. 10시간에 1천 2백원, 이걸 벌려고 하루 종일 이 지랄이라니. 오후 5시쯤엔 국수 먹는 시간이란다. 간식거리로 국수를 주는 모양이다. 멸치국에 말아 먹는 국수가 이렇게 맛있을 줄 이야. 다 노동한 덕 아니냐. 국수를 다먹고 나니 나른하고 조금은 졸립고 하는 일이 더 없어 짜증스러웠다. ‘1시간 120원’ 이걸 생각할 때마다 기계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중 윤상원은 전남대 후배였던 박기순으로부터 들불야학에 함께하자는 수 차례의 권유를 받고 야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해 11월, 윤상원은 거처를 광천동 시민아파트 B동 106호로 옮겼습니다.

그의 집은 들불야학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윤상원은 당시 전남대를 다니던 박관현과 신영일 등을 만나 ‘광주지역 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몸으로 확인한 그들은 들불야학의 강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야학을 검정고시만을 위한 학교가 아닌,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는 학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들불야학에서는 탈춤과 연극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들불야학 3기 특별 강학 박효선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박효선의 연극은 노동자가 겪은 사업주의 횡포와 노동청의 무능을 비꼰 내용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연극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교사직을 그만두었던 박효선은 극단 ‘광대’를 창립하고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을 진행하면서 문화 활동가로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들불야학은 그렇게 ‘노동운동’에서 ‘학생운동’으로, ‘청년운동’에서 ‘문화운동’과 ‘빈민운동’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들불7열사

닫는 질문

1. 들불야학을 만든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야학에 매달렸습니다. 이들에게 야학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2. 교육은 모두에게 평등한가요? 우리는 모두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 우리 곁의 들불, 모두에게 평등한 학교

교육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적 환경, 가정 환경, 가정 형편, 가계 소득 등이 때로는 배움의 장애물이 되고 이는 세상살이에서의 고비와 갈증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교육이 반드시 정규 과정의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들불야학 역시 정규과정의 학교가 아닌 교육기관으로서 배움의 공동체였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도 한 야학이 있습니다.

노들야학은 ‘노란 들판’이라는 뜻으로, 농부의 노동이 녹아난 들판에 넘실대는 결실을 뜻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규교육과정은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과서에는 점자가 없고, 층의 사이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으며, 선생님은 모두가 같은 이해력을 가졌을 거라 판단합니다.

그런 공간에서 장애인은 쉽게 배제되고, 배울 권리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출처:노들장애인야학

학교를 다니지 못하거나 초등학교만 다니는 장애인이 전체 장애인의 60%인 현실,

장애인이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해 교육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장애인은 자립하지 못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현실.

그런 현실을 노들야학은 바라보았습니다.

이곳의 교장선생님이었던 박경석님은 노들야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안에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으며 그 공로로 2010년, 제 5회 들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노들야학에서는 누구나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들야학은 장애에 대한 차별을 분석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사회를 야학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