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단지 한장으로 5·18의 최전선에 선 들불야학
여는 질문
지금은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벌어지면 SNS를 통해 빠른 속도로 알려지게 됩니다. SNS의 힘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것과 수 많은 시민들이 동시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1980년 5월에는 이러한 SNS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영방송에서는 시위에 나선 광주시민들을 폭도라며 왜곡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도 광주시민들은 1980년엔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을까요?
임을 위한 행진 다섯 번째 장소, YWCA
흔히 광고용으로 집집마다 붙어진 전단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투사회보란 이름의 아주 특별한 전단지가 있습니다.
들불야학은 설립 2년만에 1980년 5.18 민중항쟁을 마주합니다.
박용준을 비롯한 들불야학의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을 담은 ‘투사회보’를 만들어 광주 전역에 뿌렸습니다.
이로써 들불야학은 항쟁의 최전선에 서게 됩니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이들의 뜨거운 역사 속으로! 다섯 번째 장소로 출발합니다
5.18과 마주한 들불야학
일단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 너는 꼭 살아남아 학생들을 이끌어야한다.
1980년 5월 17일 군부는 불법적인 계엄령을 전지역으로 확대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사전검속에 들어갔습니다. 군부에 저항할 인사들을 잡으려는 계략이었습니다.
박관현 또한 계엄군의 검속 대상이었습니다. 군부의 감시를 피해 윤상원을 찾아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온 박관현은 윤상원으로 부터 ‘살아남아 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YWCA 신협에서 근무하던 박용준, 김영철도 연행될 뻔한 위기를 넘겼습니다.
광주는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진실을 외면한 언론
5.18 민주화운동 당시 언론은 광주의 진실을 완전히 외면했습니다.
광주의 언론들 조차도 침묵을 강요 당했습니다.
이에 언론인으로서의 자기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전남매일신문기자들은 스스로 사표를 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아주 특별한 전단지, 진실의 눈 투사회보
이곳은 다섯번째 장소, 광주 YWCA 입니다.
41년전 이 곳에서 역사의 진실을 담은 전단지가 만들어 졌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저녁 들불야학 교실에 모인 강학들이 시내의 상황을 공유하며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가 열렸습니다. 이때 윤상원은 광주의 진실을 알릴 유인물 제작을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진실의 눈, ‘투사회보’ 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주 언론들은 왜곡보도를 통해 군부의 폭력과 광주의 진실을 가리기에 급급했습니다.
이에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매 호당 1만 5천부씩 광주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 투사회보를 제작했던 곳이 바로 들불야학 교실과 YWCA입니다.
투사회보의 글자체 대부분은 박용준이 직접 썼습니다.
들불야학의 강학 박효선은 항쟁지도부의 문화부장으로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광대’ 단원들과 ‘시민궐기대회’ 를 조직하며 문화예술을 통해 오월의 진실을 알려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방광주의 상징으로 잘 알고 있는 도청 앞 분수대에 모인 시민들의 사진이 ‘시민궐기대회’의 한 장면 입니다.
시민과 만나지 못한 투사회보의 마지막 10호
이렇듯 들불야학은 80년 광주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항쟁을 주도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투사회보는 항쟁지도부의 교체에 따라 9호부터 ‘민주시민회보’ 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제 10호를 제작하던 26일 밤 12시, 박용준과 투사회보팀은 손목이 퉁퉁 붓도록 유인물 제작에 열중했습니다.
그 무렵 계엄군이 돌고개(지금의 농성동) 까지 왔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결국 ‘민주시민회보 10호’ 는 계엄군에 의해 전량 압수당합니다.
투사회보의 마지막 10호는 그렇게 계엄군의 군화발 아래 짓밟혔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을 짓밟진 못하였습니다.
퍼져나가는 가짜뉴스, 5.18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들
‘5.18 북한군 개입설’ ‘교도소 습격설’ ‘유공자 명단공개’
최근 SNS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는 5.18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들 입니다.
카카오톡, 유투브 등을 통해 우리는 어디에 있든 전세계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41년전 광주의 진실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을까요?
41년전 투사회보가 남긴 질문들에 우리가 답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닫는 질문
1. 41년전 투사회보가 담은 광주의 진실들이 지금도 제대로알려지고 있나요?
2. 전두환 신군부가 숨기고 싶어한 진실들, 우리는 여전히 누가 총을 쏘았는지 알 수 없는걸까요?
3. 여전히 왜곡과 은폐된 가짜뉴스의 홍수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1년을 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소식들은 믿을만 한가요?
4. '북한군 개입설' '유공자 명단공개' 등 왜 유독 5.18에 대해서만 왜곡과 폄훼가 심할까요?
지금 우리 곁의 들불,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
41년 전, 광주의 비명과 진실을 날카롭게 기록한 ‘투사회보’처럼
2021년 여기,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얼굴이 없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언론이 있습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휠체어의 층간이동을 돕는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 노부부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 장애인이동권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제대로 기록하거나 장애인 문제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읽어내는 언론사는 없었습니다. 2010년 1월, 저항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장애인언론사 ‘비마이너’ 가 등장 한 이유입니다.
비마이너는 장애인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진보 언론입니다.
비마이너는 장애인을 둘러싼 사회문제와 그들이 싸우는 현장에 대해 빠르고 심층적으로 보도합니다. 또한 장례를 치루어줄 지인이 없는 장애인이 사망할 경우 ‘무연고자 장례’를 함께 치루는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묘역 번호 1-01, 오월의 첫 희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입니다
그날 김경철은 친구들과 식사 후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들은 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던 그는 장애인증을 내보였지만 계엄군들은 ‘벙어리 흉내를 낸다’ 며 조롱하며 폭력을 멈추지 않았고 그는 끝내 숨졌습니다.
군부의 폭력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41년전, 광주의 진실을 밝혔던 들불 ‘투사회보’, ‘비마이너’ 는 지금의 소수자를 빛추는 들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