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최후의 항쟁,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다
여는 질문
5월 27일 도청을 지킨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을 지켰던 시민군들은 어떤 각오를 하고 있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날 전남도청에 있었다면 어땠을 것 같나요?
임을 위한 행진 여섯번째 장소, 구 전남도청
지금은 분수대와 너른 광장이 있는 아시아문화전당, 그 옆에는 아직 구전남도청이라 불리는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 앞에 있는 광장에는 시계탑이 하나 서 있습니다. 매일 5시 18분이 되면, 이 시계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멜로디가 울려퍼집니다.
5월, 41년전 이곳에서는 죽음을 각오한 ‘윤상원’ 과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계엄군이 곧 도착할 것임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날의 진실을 알려다오’
5월 26일 전남도청에 위치해 있던 항쟁지도부에 계엄군으로부터 도청을 비우고 투항하라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당시 윤상원은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기자 회견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당시 기자회견에서 ‘윤상원의 죽음의 그림자’ 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샘이깊은물 중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챈 건 마틴 기자뿐 아니었습니다. 윤상원 그도,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란걸 알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5월 26일 저녁 도청에 남은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집에 돌아가십시오. 가서 여러분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들의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 가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계엄군이 밀려오기 전에 어서들 도청에서 떠나기 바랍니다.”
윤상원 연설 중
도청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학생도 있었고, 말없이 빠져나가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157명의 시민군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습니다.
윤상원은 5월 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는 새벽 전남도청의 강당에서 끝까지 남아 투쟁할 것을 결의한 시민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투쟁에 임합시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런 기록을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5월 27일 새벽 4시 10분 공수부대의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청을 뒤덮은 최후의 항전
M16 연발사격으로 뒤덮어진 도청 민원실과 뒷문으로 밀고 들어오는 계엄군들은 그렇게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을 서서히 죄어오고 있었습니다. 윤상원은 오른쪽 배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상원 씨! 상원아!” 부둥켜 안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박용준과 투사회보팀은 YWCA 1층 소심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용준 또한 계엄군과 대치중 얼굴에 총을 맞고 비명없이 죽어갔습니다.
그날의 증언들
도청 입구와 YWCA 쪽에서 총소리가 천둥치듯 잇따라 울려 퍼졌다. 선무방송을 하는 헬리콥터가 하늘에 보였다. M16을 마구 쏘아대며 항복하고 나오라는 계엄군들의 외침이 갈수록 가깝게 들렸다.
“상원 씨,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거기서도 민주화 운동합시다.”
“그럽시다, 이걸로 끝이라면 억울해서도 눈을 못 감을 겁니다.”
비록 짧았지만 아름다운 열흘이었다. 50년 100년을 살아도 맛보지 못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았다. 우리 손으로, 광주 시민의 손으로 만든 더할 수 없이 믿음직스럽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봤다. 이제 그 빛나는 무대의 막을 내릴 때가 왔다.이양현의 증언 중
“이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모든걸 용서하시고 세상에 관용과 사랑을!”
박용준의 일기. 1980.5.26.
살아남은 자의 고통
김영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상무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박용준의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죽을 결심을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2개월 뒤 김영철에게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지만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김영철은 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그는 이미 예전의 김영철이 아니었습니다.
후유증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김영철은 98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닫는 질문
1. 가까운 동지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아갔을까요?
2. 윤상원이 부탁하였던 5.18의 진실을 알리는 증언자의 역할, 여러분은 그 부탁을 지키고 있나요?
3. 여러분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폭력은 무엇인가요? 그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4. 과연, 국가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곳인가요?
지금 우리 곁의 들불, 그 날을 기억하라
1980년이 지나고 2021년이 되었습니다
계엄군은 떠났지만, 여전히 슬픔에 차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가던 이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들입니다.
41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5.18의 희생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합니다.
또,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아 다른 사람들을 돌려보내며 끝까지 맞섰던 이들의 의지에 대해 되새깁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국가 폭력의 흔적이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가는 배에 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배가 기우는 것 같은 느낌에 한 학생이 “살려달라”고 전화했지만, 해경은 배의 정확한 위치만 물을 뿐이었습니다.
선장은 승객들에게 선내에서 대기하라고 안내했고, 배가 거의 잠길 때까지도 많은 승객들은 구조를 기다렸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모두를 이미 구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보도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 배를 탄 476명 중 304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 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광주광역시의 어떤 시민들은 이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민들은 세월호 사건을 접하고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세월호 사건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같은 일을 방지하고자 하는 뜻을 세웠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이들은 점점 모여 스무 개의 마을로 불어났습니다.
시민들은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모임의 이름을 ‘세월호 광주시민상주모임’이라 지었습니다. 또 매주 모여 진상규명을 촉구했습니다. 촛불을 들고 동네마다 서명을 받고 집집마다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광주의 여러 지역에서 모인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초청해 간담회와 강연을 진행했으며, 세월호 선원 재판에 참여하는 이들을 마중하거나 ‘팽목항 기다림의 버스’를 운영하며 미수습 가족들을 응원해왔습니다.
또, 광주지역 곳곳을 돌며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인식을 공유하는 빛고을 1000일 순례 행진, 1인 피켓팅, 촛불 모임 등도 진행해왔습니다. 이 모임은 2017년, 세월호 3주기가 되던 해 제 12회 들불상을 수여받았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오. 쓰러지지 마소."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5.18 때 일어났던 일은 4.16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왜곡했습니다.
그 날의 진실은 손쉽게 훼손되었고 잘못은 지워져갔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함은, 그저 우리에게 있었던 일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기억하며 현재 이 순간의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해내지 못했던 과제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사회, 더 이상 누군가 무고하게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는 마음 속의 구멍을 만져보거나, 다른 이의 구멍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윤상원의 말처럼, ‘내일의 승리’를 얻고, 떠나간 사람의 의지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