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귀(동성고 2학년)
이성귀 (동성고등학교 2학년. 17세) 묘역번호 2-20
- 안장장소 :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 2묘역
- 묘역번호 : 2-20
- 성 명 : 이성귀
- 출생년도 : 1964-03-11
- 사망일자 : 1980-05-24
- 이장일자 : 1997-05-13
- 직 업 : 고등학생
- 사망장소 : 도청 앞
- 사망원인 : 총상(두개골 관총 총상)
참뜻을 펼치다 산화한 내 아들아. 편히 잠들거라.
혼자 살아 있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하였을 어머니는 1년만에 세상을 뜨셨다.
5월 21일이었습니다.
성귀는 학교가 휴교가 되어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차분하면서도 밝은 성격에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고 공부도 잘해서 부반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영암에 계셨고 시골친구와 형과 함께 산수동에서 자취를 하며 지냈습니다.
도청을 지나 학생회관 도서관으로 가는 길 갑자기 총성이 들렸습니다. 삽시간에 비명소리와 총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친구들은 놀라서 무조건 앞으로 뛰었고 뛰다보니 성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다려도 자취방으로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영암집에 연락할 길이 없었던 친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성귀의 어머니는 바로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했습니다.
제발 살아있기만을 바랬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광주로 들어가는 길, 서창 입구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계엄군에게 제지 당했습니다.
자식 때문에 가는 길이라는 하소연에도 군인들은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던 어머니는 택시에서 내렸고 먼 길을 돌아 광주에 걸어서 들어갔습니다.
광주로 걸어 들어가는 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도청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어머니는 곧장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도청에는 이미 관속에 들어가 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의 몸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총알이 뚫고 지나간 머리는 절반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습니다. 멍한채로 아들을 바라보며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올라온 아버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울다 지쳐 정신이 멍해졌고, 그러다 다시 모르는 사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며칠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이 계엄군이 다시 도청으로 들어올 것 같다며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성귀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영암으로 내려갔다가 27일 항쟁이 끝난 후 다시 아들을 찾아 도청으로 왔습니다.
성귀의 가정은 가난했지만 단란했습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끼니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성귀를 묻고 어머니는 특별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으셨고, 결국 1년 만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뜨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