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열(조대부중 3학년)
김부열 (조대부중 3학년) 묘역번호 2-29
- 안장장소 :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 2묘역
- 묘역번호 : 2-29
- 성 명 : 김부열
- 출생년도 : 1963-05-03
- 사망일자 : 1980-05-22
- 이장일자 : 1997-05-11
- 직 업 : 학생(조대부중 3학년)
- 사망장소 : 지원동(부엉산 추정)
- 사망원인 : 총상(흉부상부절단, 다발성 총상)
가는 이 말이 없고 사는 이 고통과 번뇌로 만신창이가 되었네. 나 또한 지쳐 쉬고 싶노라.
스스로 시민군이되어 총을 쥔 열여덟살의 김부열
1980년 5월 21일이었습니다.
김부열은 휴교령으로 집에만 있기 심심하여 절을 향하는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습니다.
“시내가 시끄러운디 너는 어딜 갈라고 그러냐?”
“응, 친구집에나 갈라고, 집에만 있을랑께 갑갑해서”
“그믄, 언른 댕겨와서 집에 꽉 붙어있어라잉!”
어머니는 절을 향해, 부열은 친구 집을 향해 집을 나섰습니다.
절을 향하던 어머니는 금남로에 가득한 사람들과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아들에게 무슨일이 있을까 부랴부랴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금방 다녀온다고 했던 부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애타는 심정으고 기다렸습니다.
부열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부열의 손에는 총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시민군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가 기다릴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친구집을 향하던 부열은 군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광주시민들을 죽였는지 보아버렸고, 스스로 총을 들고 싸워야 내 가족들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5월 21일 시민들이 무장을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계엄군은 도청에서 철수하여 광주시의 외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계엄군들은 광주를 향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그 근처의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7특전여단과 제 11특전여단은 지원동 주남마을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도로를 차단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순을 향하던 미니버스를 향해 무차별적은 총격을 가해 많은 시민들이 죽었고, 주남마을의 주민들에게도 총격이 가해졌습니다.
부열은 주남마을 야산에 매복한 군인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되려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온 거리를 돌아 다녔고 모든 병원을 찾아 헤메었으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봉쇄작전을 인계 받은 20사단으로부터 김부열이 23일과 24일 사이에 계엄군의 총에 사살당했다는 것만이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20여일이 흘렀습니다.
6월 12일 시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열이 주남마을 뒷산에 매장되어 있으니 와서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땅을 팔 인부들을 데리고 부열을 찾으러 갔습니다.
부열이의 시신은 형체조자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목이잘려 나가 있었고,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습니다.
시신의 검시마저 힘들어 부열이의 사타구니 사이의 점으로 형제들은 겨우 확인할수 있을정도 였습니다.
산중에 버려져 있던 부열은 20여일이 지나서야 가족을 만났고 공동 묘지에 묻혔습니다.
김부열에게는 무장시위에 참여하였다하여 폭도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