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필(동성고 1학년)
안종필 (동성고등학교 1학년 .17세) 묘역번호 2-41
- 안장장소 :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 2묘역
- 묘역번호 : 2-41
- 성 명 : 안종필
- 출생년도 : 1964-05-23
- 사망일자 : 1980-05-27
- 이장일자 : 1997-06-14
- 직 업 : 고등학생
- 사망장소 : 도청
- 사망원인 : 총상(우흉부 관통 총상)
종필아 살아남은 자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갈게. 너의 숭고한 정신 이 땅의 민주화에 길이 빛나리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너를 죽도록 사랑하는 형과 누나가.
도청의 마지막을 지킨 17살 소년시민군
5월 19일 오전이었습니다.
광주 시내의 모든 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학생들을 일찍 귀가 시켰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던 종필은 20일 아침에 한통의 전화를 받고 “엄마, 학교에서 나오라네.”하며 교복을 챙겨입고 책가방을 들고 집을나섰습니다.
어머니가 저녁때가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집밖을 나가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시꺼멓게 지나가고 있엇습니다. 혹시 종필이가 있을까 찾아보던중 대열에서 툭 튀어나온 종필이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안겨주고는 도로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열에 합류해 앞으로 가버려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서야했습니다. 그날 밤새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건물들이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타들어 갔습니다. 21일이 되어서야 종필이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너 시방 어디서 오냐? 너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뭔 일이라도 생기믄 그것은 개죽음이여야, 나가지 말아라.”
“개죽음같은 것 안당해, 김대중이 잡혀갔당께, 그냥 어떻게 집에만 있단가. 군인들도 없응께 걱정하지 말어. 나야 도청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있응께 염려할 것 없당께.”
또 말을 듣지않고 나갈 태세였습니다.
화가 난 어머니는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옷가지들도 죄다 물에 담가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종필은 다음날 또 몰래 집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찾아 온 시내를 헤메고다녔습니다.
5월 24일이었습니다.
집 앞 산수오거리에서 총을 메고 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차를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안에 종필이가 타 있는것입니다.
“아야, 종필아! 종필아 얼른 내려라,얼른 내려”
“엄마, 나 도청 들어갔다가 금방갈게. 얼른 집에 들어가 있어.”
어머니는 다급한 마음에 도청까지 쫓아가 기어이 종필이를 찾아 냈습니다.
“안 그래도 내일 교회 갈라고 오늘은 들어갈라고 했는디 뭣하러 왔는가?”
기어이 아들을 집에 끌고 온 어머니는 또다시 나가버릴까 불안하여 잠도 못들고 기다리다 종필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야 잠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종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필은 2층에 있는 누나 집에 올라가 밥을차려 먹고 교련복을 입고 또 나가버린 것입니다.
27일 새벽, 종필이는 도청에 남아있었습니다.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종필의 두려움은 얼마나 컷을까요.
새벽2시, 천지를 가르는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고 종필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며칠전 잠들기 전 보았던 환한 얼굴이 마지막이 되버린 것입니다.
새벽 총소리에 놀라 아들을 찾아야 한다며 뛰어나가려던 어머니는 말리는 딸의 손에 붙들려 그대로 주저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죽음의 총성이 울렸어도 아침의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랐습니다.
안종필의 조카 안혜진씨의 추도사 중
저보다 훨씬 어렸던 열 일곱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삼촌이 도청에서 숨졌을 때 큰 형이었던 제 아버지는 할머니 대신 그 모질고 힘든 상황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동생의 시신을 확인해야 했고, 쫓기다시피 삼촌을 망월동에 묻어야 했으며, 차마 막내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아파서 할머니에게 시신조차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일을 두고 아버지는 평생 아파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도 그 때는 제 나이였을 청년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우리 가족처럼 광주의 일년은 5월부터 시작해서 5월로 끝납니다. 일년 내내 5·18을 이야기 하고, 일년 내내 5·18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5·18은 애증이고 아픔이고, 기억 그 자체입니다.
요즘 저희 할머니는 막내아들인 삼촌의 기억도 점차 잃어가십니다. 가슴에는 아직도 그날이 한으로 남아서 인지 눈물도 많아지셧습니다. 아픈기억이라고 잊기 보다는 그 기억을 다잡아 제 가슴에 간직하려고 합니다 삼촌을 기억하고 그날 그자리에 있었던 그분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오월 그날 청년이었던 우리 아버지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제 할머리를 위로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2019년 39주기 추모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