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청소년
5·18 광주민중항쟁에는 10대 청소년들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5·18 직전에 진행된 ‘민족민주화 성회(5월 14일~16일)’부터 고등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한 5월 19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 국민을 총으로 다 죽이고 있는데 수업을 하실랍니까?”
1980년 5월 19일, 대동고등학교의 박행삼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휴교령 소식을 알리기 전, 무조건 출석부터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학생 한 명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선생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선생님! 수업을 꼭 하실랍니까? 우리 국민을 총으로 다 죽이고 있는데 수업을 하실랍니까? 우리들의 부모, 형제가 죽어가는데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참았던 울분이 북받쳤습니다. 선생님은 결국 교탁에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었습니다. 학생들 울부짖는 소리가 교실에 가득 찼습니다.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학생들이 복도로 뛰쳐나가며 소리쳤습니다.
“민주학생 동참하라! 민주학생 동참하라!”
순식간에 다른 3학년 교실 학생들도 복도로 뛰쳐나왔습니다. 3학년 학생들은 1,2학년 교실을 돌며 소리쳤습니다.
“민주학생 합세하라!”
“민주교사 합세하라!”
“광주시민 학살한 공수부대 때려죽이자!”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
순식간에 600여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모였습니다.
“학우 여러분, 지금 금남로에서는 우리의 부모 형제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도 시내로 나가 공수부대원들과 싸웁시다.”
학생들은 함성과 함께 교문으로 향했습니다. 교문 밖에는 계엄군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박행삼 선생님과 윤광장 선생님은 급히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곤 교문 앞에 드러누운 채 학생들을 막아섰습니다. 두 교사는 울부짖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심정은 저희가 충분히 압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나간다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저 사자들의 아가리에 거저 몸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도 귀중합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저들과 싸울 수 있는데, 여기서 이러면 희생만 커집니다. 여러분들의 의로운 행동을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맞대응하면 우리 목숨 다 잃습니다. 오늘은 참읍시다!”
두 선생님의 눈물어린 호소에 학생들은 집단 교내 시위를 해산하고 개별적으로 도청이 있는 금남로 시위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날,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도 교내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오전 10시였습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회장 박찬숙을 비롯한 학생 1천 4백여명이 모였습니다.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이 많이 죽었다!”
중앙여고 학도호국단 연대장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말했습니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데모를 하다 다치고 죽었다. 조의를 표하기 위해 교복의 칼라를 떼자.”
연대장의 제안에 학생들은 교복 카라를 떼고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이밖에도 광주일고, 광산여고, 정광고 등에서도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진행했다는 계엄군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석고등학교의 학생들은 1980년 5월 당시의 기억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서석고 3학년 학생이었던 61명이 각자가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체험했던 5·18을 엮어 〈5·18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 중 오일교의 증언은 공수부대가 ‘편의대’라고 불리는 위장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운영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 갇힌 채 온갖 고문을 당한 편의대 피해자였습니다.
“시위대에서 함께 했던 30대 청년이 권총을 꺼내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 청년은 검문 중인 군인들에게 신분증을 보이더니 나를 인계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형처럼 믿고 따르면서 함께 활동했는데 기가 막혔다. 그 청년은 시민군이 아닌 군인의 신분을 속이고 시위대의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시위대에 합류한 계엄군이었다.”
이 책은 5·18 당시 고등학생들이 일상에서 겪은 5·18을 가감없이 기록함으로서, 5·18이 평범한 시민들의 항쟁이었음을, 광주지역의 평범한 고등학생들 대다수가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이 책을 계기로 다른 여러 학교들에서도 5·18 체험과 관련된 도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어, 5·18의 위대한 항쟁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이 계승되는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두환, “고등학생이 나서면 나라가 뒤집어져! 어린것들은 겁이 없잖아! 당장 휴교령 내려!”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마다 청소년들의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걸까요? 전두환은 광주지역의 중고등학교 휴교령을 직접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청소년이 시위 참여, 헌혈, 유인물 배포, 부상자 간호 등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항쟁에 참여하였습니다.
한편,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한 청소년 노동자들도 많았습니다. 1980년 당시 고등학교 진학률은 48.8%였습니다. 청소년 노동자들 역시 여느 광주시민들처럼 계엄군의 폭력에 항의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한 15명 가운데 8명이 청소년이기도 했습니다. (고1 2명, 고3 1명, 재수생 2명, 직장인 1명, 대학생 2명)
문재학: 16세,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 16세, 광주상고 1학년
박성용: 18세, 조대부고 3학년
이강수: 19세, 재수생
김종연: 19세, 재수생
홍순권: 19세, 페인트공
유동운: 19세, 한신대
서호빈: 19세, 전남대
또한 5·18은 고등학생들의 사회참여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5·18 이후 학생회 구성과 동아리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직적인 청소년 운동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91년 보성고등학교 3학년 김철수는, 학생회 주최로 진행되었던 교내 5·18 기념행사에서 ‘참교육 실현’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청소년 운동의 지평은 기득권에 대한 저항으로 넓혀지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선도하는 방향으로 청소년 운동이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청소년들은 역사적 주체로 참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서 한 획을 그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체도 청소년이었고, 이승만 독재를 끝낸 4·19 혁명의 도화선도 고등학생 김주열의 죽음이었습니다.
5·18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사회 참여는 지속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에도 적극 참여하여 직선제 쟁취에 기여하였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여중생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며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도 청소년들은 목소리를 내며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